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야마 도미이치 (문단 편집) ==== 평가 ==== 한국에서는 과거사 문제로 매우 고평가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나, 일본 내에서의 평가는 한국의 [[사고 공화국]] 시절에 필적할만한 대형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점 때문에 다소 부정적이다. 과거사를 반성하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위에 서술한대로 [[1995년]] [[한일합방]]에 대한 망언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의석수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자민당의 노선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 연립 내각을 구성한 정당 중 자민당이 절대 다수당이었기 때문에 [[고노 요헤이]]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비롯해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내각 내 요직을 독점한 수준이었기 때문.] 무라야마의 재임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으로 아주 길지도 또 짧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담으로 [[김일성]]이 죽은 사건이 총리에 오른 직후에 터졌다.] 1995년 1월에는 [[토호쿠 대지진]] 이전까지 전후 최대규모의 피해를 낳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고, 불과 석 달 뒤인 3월에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특히 고베 대지진에서 [[일본 정부]]의 늑장 대처로 피해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이후 1년동안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무라야마 본인도 개인은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지가 약해서 재임 초반부터 사의를 밝히면 다른 각료들이 만류하는 식으로 간신히 내각을 이끌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선전환을 둘러싼 당 내분에 재임기간 내내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5년 8월 15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기한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의 업적으로 나름 사회당 정권다운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 다만 사회당 내에서는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려서 사회당이 결국 망한거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실제 지지율도 낮았던데다가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물러난 이후 일본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기는 했지만 되려 구 사회당 의원과 당원, 노조 등의 조직의 상당수가 사민당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서 [[신당 사키가케]] 탈당파 의원들[*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겐바 고이치로]], [[아라이 사토시]], [[오자와 사키히토]], [[이시이 코키]] 등 15명]과 합세해서 [[민주당(일본 1996년)|구 민주당]]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사실 도이 위원장과 더불어 무라야마 자신도 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는 이들의 입당을 거부했는데, '''도이와 무라야마의 이미지가 너무 나빠서'''(...) 민주당이 구식 정당으로 보일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1996년 총선에서 고작 1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그 이후로는 1998년 참의원 선거와 2000년 중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중의원에서 10석도 못얻는 군소야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당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정당인 [[일본공산당]]이 야당 중 늘 1당 역할을 맡아왔던 사회당을 추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결국 현재에는 사민당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정당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정치인으로서 받는 비판은 어쩔 수 없으나, 일본사회당 몰락의 책임을 전부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단독내각도 압도적 다수의 연립내각도 아닌 상황에서 당의,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사회당의 당세는 1960년대 이후로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과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절을 제외하면 꾸준히 정체, 혹은 하락세였고 자민당에 밀려 정권을 잡은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수권능력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경제성장률이 1991년 이후 최고치인 2.7%를 기록하며 뚜렷하게 반등하기 시작하는 등의 공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집권기간 동안 대형사고의 임팩트가 큰데다가 후임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시작으로 [[잃어버린 10년/일본|잃어버린 10년]]의 서막을 연 탓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어 재평가받을 여지를 줄인 것도 큰 원인이기는 했다. 무라야마 총리 시절 사회당은 그동안 거듭해왔던 비현실적인 정책 일부[* 과한 친북 성향, 자위대 해체 주장 등]를 수정하여 사회당의 중도화를 꾀하는 등 나름 사회당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무라야마의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그나마 사회당에 남아있던 유권자들마저 사회당의 불분명한 색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지지 정당을 옮기게 되었다는 재반박도 존재한다.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지도 꽤 되었고, 아무래도 현재의 사회민주당은 [[오키나와현]]을 벗어나면 전혀 영향력이 없는 정치 단체급의 군소 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총리 시절 일으켰던 실책들은 점점 잊혀가고 대신 최장수 총리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추세이다. 소위 '정치'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평. 그래서 현재 들어서 무라야마 총리에 대한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평가는 "정책 방향이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겸손했고 인품이 좋았던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